□ 시조의 창가에서(‘시조세계’ 봄호를 읽고)
봄의 시, 시의 봄
권 혁 모
1
지난겨울, 한반도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을 때, 나는 지중해가 있는 이스라엘을 여행할 수 있었다. 지금의 정황은 여행이 금지될 정도로 매우 심각하지만, 당시에는 여행을 하거나 생활하는데 큰 불편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따금씩 발생하는 테러쯤은 그곳 사람들의 일상으로, 그만치 전쟁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해에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스라엘과 관련된 4차례의 중동 전쟁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라도만한 면적에 600만 명이 살고 있다. 지중해에 바로 연접한 북쪽의 일부 지역(서울시만한 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사막으로,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소위 불모의 땅이었다.
이 땅을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그리고 ‘가나안의 땅’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2000년간의 긴 유랑 생활을 끝내고 속속 돌아와 이 약속의 땅을 푸른 옥토로 바꾸어 놓았다. 연중 강우가 거의 없는 황량한 광야에 거미줄처럼 물관을 이어 대추 야자와 오렌지 등의 수목을 기르고 있었다.
만년설 덮인 북부 고원의 헤르몬산 아래, 생명의 초록빛이 넘실거리는 골란고원과 샤론평야는 마냥 뒹굴어도 좋을 초원의 무대였고, 일 년 내내 봄의 언덕인 텔아비브는 해변에 그림처럼 떠서 활력 넘치는 도회의 멋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지중해 바닷가를 비롯한 갈릴리 호수와 사해의 아롱거리는 새벽 가로등 길을 참 많이도 달리며, 그곳의 눈부신 봄 이야기를 가슴에 아로새길 수 있었다.
『시조세계』 봄호를 펼치며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그런 반가운 이야기를 만난다. 세상에 ‘봄’만치 좋은 게 없는가 보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추억이란 언제나 지나온 과거를 전제로 한 것이며, 또한 과거란 인생의 봄에 밀집되어 있는 것! 그래서 봄을 아름답게 추억하며 그리움의 손수건을 젖게 하는지 모른다.
『시조세계』 봄호의 넘치는 작품군 가운데 특히 유채꽃처럼 눈부신 색조를 만나게 된다. 누가 그랬던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고 말이다. 비록 노병 예찬론이 아니더라도, 건재한 노익장으로 언제나 주옥같은 시조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정완영 선생의 작품 앞에서 절로 숙연해진다.
사실 황혼기의 작품들이 성공을 거두기가 그리 쉽지 않은 현실에서, 한 점 흐트림 없는 경지를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종점이 가까울수록 더욱 단정한 언어의 빛깔로 가슴속 봄을 그리고 있기에, 잔잔한 감동을 더하게 한다.
立春절 이미 지나고 내일 모레가 雨水라니
봄은 어디쯤 왔는가, 내 고향쯤에 왔는가,
아니지! 추풍령 고개 그쯤 자리 깔았는가.
동구 밖 지켜 서서 산모롱이 눈길 주는
닷새장 보러 간 엄마 마중 나온 소년처럼
나는 왜 기다려지는가, 이봄 자꾸 설레는가.
春來不似春인데 봄은 온들 뭘 할까만
장에 간 엄마 같은 봄, 또한 봄은 기다려져
기차길 돌아간 산굽이 두릅순이 자꾸 오른다.
- 정완영의 「봄이 온들 뭘할까만」 전문
그렇다. 봄에게 “너는 도대체 어디쯤 왔는가. 고향쯤에 왔는가. 추풍령쯤에 자리 깔고 있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는 건, 노시인의 여유일까? 아니면 그만의 독특한 향기일까?
그런 가운데, 마음은 철없는 소년이 되어 장보러 간 엄마를 마중 나간다. 불가능의 기다림을 마음속에 그리며, 설레임에 젖어보는 모습이야말로 진정 정을 지닌 인간의 참모습일까?
당 나라의 대시인 이백이 “오랑케 땅에는 꽃도 없고 풀도 없으니, 봄은 와도 봄 같지 않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라고 노래하였듯이, 정완영 선생 또한 “현실로 돌아온 봄은 봄이 아니었고, 봄이 와도 별 수 없다”는 체념에 젖게 된다. 그렇지만 장에 간 엄마가 무엇을 사들고 올 것만 같은 이런 봄날이 더욱 기다려져서, 기차길 산굽이의 두릅순은 자꾸만 피어오른다고 하였다. 이만치 좋은 봄이 또 어디 있는가? 이렇게 기다려지는, 그리워지는 봄을 선생은 가슴 가득 안고 있는 것이다.
2
지난 1월 하순,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에 위치한 사해의 한낮은 반팔 옷을 입어도 될 정도로 무더운 날씨였다. 이런 날 사해에서 수영할 때, 잘못하여 염분 농도 30%의 사해 물이 눈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고 한다. 그래서 수영복을 갈아입고 조심스럽게 사해에 들어갔다. 수영이라고 하기 보다는 뒤로 누워 둥둥 뜨는 실험을 하였다. 그리고 사해 바닥을 이룬 유명한 머드팩을 전신에 발라 잠시 흑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은, 염도가 너무 높아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죽음의 호수 사해를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 거기서 미네랄을 추출하여 값비싼 미용 비누 등의 화학제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팔고 있는 유대인들이 얄밉도록 부럽기 그지없다.
아무리 문대봐도 거무튀한 이 살가죽도
해맑고 촉촉하고 싱싱하게 윤기 도는
그림 속 덕진 蓮처럼 거듭날 수 있다면…
진흙을 처바른다. 수렁 속에 감금됐다.
에워싼 찰거머리에게 선뜻 살신공양 하듯
지옥에 몸을 눕히고 세상 잃는 훈련이다.
소요되는 기간은 지리한 겨울 한철
난분분한 백설에 분칠하여 마냥 부신
나목들 팔을 흔들어 “빨리 나와”라 성화다.
문빗장 확인한 뒤 눈 꼭 감고 귀도 막고
반나절 꿈속에서 겨울 속히 보내고
오뉴월 못물 속엔 듯 부시시 눈을 뜬다.
- 이애순 「머드팩」 전문
이애순은 「머드팩」에서 해맑고 촉촉하고 윤기 도는, 전주 덕진공원 蓮처럼 그런 피부를 갖고싶은 소망을 발단으로 전신에 진흙을 바르고 있다. 기어이 연꽃으로 환생하기 위해 스스로 살신 공양을 선택하였다.
백설 흩날리는 길고 긴 겨울, 비울 것 다 비운 겨울 나목까지도 “빨리 나와라” 성화를 내지만, 자신은 인고의 겨울을 견딘다. 그리하여 길고 긴 겨울도 일순! 새봄 못물 속에서 기어이 연꽃으로 눈을 뜬다고 하였다.
사해에서 검은 찰고무질 머드팩을 찍어 바를 때의 내 생각은 한갓 피부가 고와진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이애순은 전신에 진흙을 발라 겨울 긴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낼 때, 흔히 불가에서 말하는 함축적 의미의 연꽃송이로 환생한다는 것이다.
4수로 이루어진 「머드팩」은 기승전결의 구성으로 완결미를 거두었다. 머드팩이 말하는 外延과 진흙 속에서만이 피어나는 연꽃의 內包를 복선으로 처리하여 이미지의 긴장 관계를 창조하였다.
유영애는 미당 서정주 선생의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내고 있다. 사실 어느 사람에 대한 회고의 시는 창작자 스스로도 알게 모르게 과장되거나, 또는 그 에 대한 견해를 합리화시키려는 감성이 앞서기 쉽다. 그리하여 작가는 독자 몫의 상상력 앞을 독주하는 관계로, 도중에 더 읽고 싶은 의욕을 상실하게 한다. 인물 평전을 쓰는 시는 그만치 어려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유영애는 미당 선생과 20년 동안 기와 담장을 사이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 동안 선생 내외로부터 잔잔한 정을 받아 왔기에, 이제 두 분 다 고인이 된 시점에서, 그 이야기들이 그리움이 되어 먹물처럼 번져 온다고 했다. 그렇게 두 분과 사귀어 온 이야기를 ‘봉산(蓬蒜) 山房의 추억’으로 하여 22편을 연작한 것이다.
흔히 시조가 갖추어야 할 詩와 歌의 멋들어진 품격이야말로 동서 시가문학의 압권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아직 문단 연조가 일천한 유영애 의 작품이 조심스럽게 읽혀지고, 또한 잔잔한 반향을 불러오는 건 반가움이자 수확이다. 그것은 시단 주변에서 그 이름값에도 어림없는 눈물겨운(?)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기에 그러하며, 이름만 가리면 초등학교 백일장에도 못 오를 작품이 수상작에 오르거나, 혹은 대리 작품과 표절이 난무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른다.
지아비 늘 앞세우며 한 걸음 늘 뒤에 서시더니
왜 한 발치 앞장서서 구름 속에 가셨나요
한국화 조선의 여인 가슴 안에 그립니다.
- ① 柳令愛의 「蓬蒜山房 추억-방여사님」
그녀 먼저 숨 거둬 떠나갈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으리‘라더니
피리에 차마 담을 수 없어 종종걸음 치셨나요
새벽이면 장독대에 정한수 올려놓고
지아비와 자손 위해 빌고 빌던 어진 아내
지아빈 빈 사발 가득 시 한 수 띄우셨지요.
- ② 「蓬蒜山房 추억-빈 사발」
담장 사이 마주하며 살뜰했던 예술인 마을
이제는 적막 강산 문향마저 외롭구나
감나문 등불 켜 들고 행여 오실까 채비한다.
- ③ 「蓬蒜山房 추억-등불 켜든 감나무」
구중중한 가을비에 적막 마져 젖던 그 밤
한 타래 하얀 빛이 문갑 위에 앉았었다.
친필로 난 치고 시 얹어 눈뜬 백자 항아리.
꿈길 열고 생시 마냥 다시 오신 나들이 길
‘새벽 지샐 녘 란초 한 송이’ 시어들이 반기는데
빈 방에 난향 피우시곤 바람처럼 또 떠나셨다.
- ④ 「蓬蒜山房 추억-백자 항아리」
인적 끊긴 미당 古宅 가마굴도 만무한데
대추며 모과며 감을 누가 저리 굽고 있나
문 닫힌 봉산 산방에 햇살 혼자 바쁜갑다.
- ⑤ 「蓬蒜山房 추억-古宅」
유영애는, 친정어머니처럼 따뜻하였고 음전하셨다던 선생의 부인 방 여사를 통해, 인간적이며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누구보다 미당 선생 내외가 다 떠날 때까지 가까이에서 살아오며 지켜본 이야기를 「蓬蒜山房의 추억」 연작을 통해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작품 ①은, 늘 한 걸음 지아비를 앞세우고 자신은 그 뒤에 서시던 여사였건만, 가실 때에는 지아비보다 한 걸음 앞서 구름 속에 가셨다고 한다. 한국화 속의 조선 여인이셨던 방 여사를 그의 가슴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작품 ②는 두 분 살아생전의 이야기로, 혹 아내 먼저 떠날 땐 그 숨결을 달라고 하여 자신의 피리에 담겠다고 하였단다. 그러나 아내의 숨결을 달래서 선생의 피리에 담지 못하였고, 아니 차마 담지 못하였기에 선생께서 떠났느냐며 안타까운 질문을 던진다. 또한 새벽이면 빈 사발에 정한수를 담아 정성을 다해 빌던 아내였지만, 미당은 그 빈 사발에 아내의 정성만치 시를 담았다고 끝을 맺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작품 ③의 「등불 켜든 감나무」에서는, 선생이 떠난 관악산 기슭의 예술인 마을은 다 비운 듯 허전하다고 한다. 그 적막 강산에 어쩌면 미당을 기다리기 위하여 감이 등불을 켜 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다림의 주체를 자신이 아닌 감나무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객자의 입장에 서버린다. 이것이 무기교의 기교로 시적인 공감을 더하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작품 ④의 「백자 항아리」에서는, 가을 비 만으로도 적막하건만, 적막이 가을비에 다시 젖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선생께서 주신 백자 항아리가 한 타래 빛으로 앉았으며, 당신 친필로 난과 시를 얹었기에 항아리가 눈을 떴다고 하였다. 둘째 수는, 항아리가 눈을 떴기에 선생께선 생시 마냥 나들이 오셨고, 항아리의 글자는 주인이 왔기에 반기고 있는데, 선생은 글귀처럼 빈방에 난 향만 피우고 떠났다 하였다.
작품 ⑤는, 이제 인적이 끊긴 쓸쓸한 고택! 거기에 더하여 부동산 업자들이 자주 빈집을 기웃거리며 흥정하는 우울한 소식에 만감이 젖는다고 하였다.
선생의 집에 어찌 가마굴이 있으랴? 그런데, 누가 있어 대추를 빨갛게 굽고 있는가? 모과는 샛노랗게, 그리고 감은 저렇듯 불타는 색조로 말이다. 그건 문 닫아 두고 떠난 봉산 산방이었기에, 이제는 세월마저 여유로운 것! 햇살만이 허락 없이 내려와서 저런 열매들을 굽기에 바쁘다고 하였다.
앞의 작품은 봉산산방의 발표작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편편마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 가운데 행간이 일정한 보법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이야기가 새롭고 읽는 이에게 감동을 더하게 하였다. 특히 밑줄 친 부분에서는 어떤 사실과 현상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흔적이 돋보이기에 단수로도 충분한 의미의 확대를 거두었다.
주옥같은 작품은 짧아도 결코 짧지 않아야(短而不短) 시조의 매력을 더할 것이다. 이에 비하여 마치 누에가 실을 토하듯,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섰노라”는 주석까지 덧붙인 장황한(황당한) 작품(?) 앞에서는 나의 언어조차도 말문이 막힌다. 시에서 말이 많다는 것은 시적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였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길어도 길지 않는(長而不長) 것은 절대로 시가 될 수 없으며, 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곧 시조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상통할 것이다.
3
던져라
두꺼운 살과 뼈와
질긴 願
저 깊고 푸른 沼 속에서
한 천년 썩어라
나뭇잎 한 장에 어리는
물 무늬로 필 때까지
- 서숙희의 「폭포」 전문
유리잔에 고이는 홍옥빛 차 한 잔에
투명하게 잠겨드는 초겨울 휴일 하오
적막도 다정한 벗인양 빈 어깨에 따스하다.
- 서숙희의 「홍차 한 잔의 오후」 전문
서숙희가 말하고자 하는 ‘던짐’의 주체는 무엇인가? 자신이 살아온 만큼의 모든 것을 한 번 빠지면 꼼짝달싹 못할 폭포에 던져 넣어, 나뭇잎 한 장에 물무늬가 어릴 때까지 천 년쯤은 썩고 싶다고 했으니, 이를 두고 현실 도피라고 하던가? 답답한 내면과 시원한 폭포가 만나 어떤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때가 더러 있을 것이다. 누구든 살아가는 동안에……
유리잔 안에 담긴 홍옥빛 차 한 잔을 앞에 둔, 초겨울 하오의 적막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홍차 한 잔의 오후」는 늘상 앞만 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되돌려주고 있어서 편안하다.
李起羅는 「팔당호」에서 물의 숭고한 의미를 재발견하고 있다. 흔히 상투적으로 직접 타이르거나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듯한 시위를 슬며시 끄집어내어, 끝 부분에는 “결단코 불의와는 타협 않을 맑은 정신”으로 간접적인 주문을 하고 있다.
필시 무슨 기별을 받기라고 했었던가
골짝마다 지닌 이름 빠짐 없이 모여와서
지금 이 물의 광장에 집회할 일 있는 건가.
달려오지 못하는 산들의 몫까지도
대리권을 쥐고 있을 사뭇 저 푸르럼
집회는 연일을 두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더 이상 수용 못할 한계의 수위에선
닫아 둔 문을 열어 방류가 계획되고
물보라 활개를 치며 자유의 길일텐가.
운집의 명목 아래 침묵의 깊은 의미
결단코 불의와는 타협 않을 맑은 정신
먼 바다 닿을 때까지 누려지라 누려지라.
- 李起羅의 「팔당호」 전문
저마다 지닌 이름을 누가 여기에 불러 모았는지, 물은 팔당호에 모여 집회를 하고 있다. 모든 산들도 모여야 하는데, 물은 오지 못하는 산의 대리 자격을 보태어 모여 와서 날마다 침묵시위를 벌인다.
모인 시위대가 일정한 한계를 넘을 땐 수문을 열어 방류하게 되는데, 그때 수문으로 내려간 물은 자유의 물이 되는가? 침묵으로 일관하는 시위는 “결코 불의(물을 더럽히는)와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물의 숭고한 정신이라 한다. 물이 먼 바다에 닿을 때까지 부디 그런 숭고한 정신으로 흘러 가거라며 간절히 주문하고 있다.
이기라의 「팔당호」는 ‘일찍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새롭게 보기’, ‘모른 채 하기’ 등의 시적인 묘미를 더하게 하는 방법이 동원된 수작이었다.
4
2001년 9월 11일, 세계의 중심 뉴욕하고도 그 심장부가 폐허로 변해 아비규환의 지경을 만들고 말았다. 이에 대한 응징(?)이 두드릴 곳조차 찾기 힘든 아프가니스탄에 내려졌다.
핏물 든 아프간에
뒤흔드는 바람 소리
부질없는 눈물을 섞어
찌든 달이 떠오겠지
뼈끝에 아리는 참회
찢어지는 아랍史여.
힘이 정의라해도
칼날은 무작하고
지엄한 經典들도
휴지되어 날아가고
불타는 樂譜 한 소절이
저 하늘을 덮고 있다.
- 임종찬의 「아프간의 하늘」 전문
진정 아프가니스탄의 하늘에 봄은 없는가? 엄청난 포탄을 쏟아 부어 핏물 든 바람 소리를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어디가 전쟁의 발단 부분인지 알 수 없는 혼돈된 세계사를 다 덮어두고, 지금은 눈물조차도 부질없는 아랍의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엄격한 종교의 경전도, 지축을 흔드는 포화 앞에선 한갓 휴지에 불과한 것! 어떤 의미에서든 아랍을 노래하는 평화의 악보도 불타서 아프간 하늘을 덮고 있다며 안타까와한다.
비록 전쟁이 아니더라도 황량한 사막뿐인 곳! 두드릴 곳조차 찾을 수 없을 가난의 벌판에 사는 사람이야 오죽하랴! 자존심을 건드린 힘의 논리는 약자를 두드려서 체면을 되찾는다. 그리하여 들끓는 국민들의 원성을 잠재우고자 하였다.
앞의 「아프간의 하늘」 연장선에 ‘아프간의 부상 소녀 파르미나에게’라는 부제를 단 정용국의 「검은 별」이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일곱 살 너에게
세상은 도대체 그 누구의 이름으로
새까만 모래바람을 뒤집어 씌웠는지.
자신에게 물 한 모금 허락하지 않아도
거친 빵 한 조각을 이웃에게 건네는
라마단 그 깊은 마음 어린 너도 알랴만
서로를 찔러대는 칼도 아닌 칼들을
부질없이 내닫는 어른들의 迷妄을
아이야 이겨내야지 깨우쳐 알 때까지
어찌 하늘에 빛나는 별들만 있겠니
없는 듯 숨었어도 응어리 삭혀내는
작지만 뜨겁게 타는 검은 별이 되거라.
- 정용국의 「검은 별-아프간의 부상 소녀 파르미나에게」 전문
일간지 사회면의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가난한 아프간 난민-예쁘디예쁜 소녀를 생각해 보라. 세상의 그 누가 시킨 것인지? 누구의 주문이었는지? 미사일 공격으로 이렇게 모래 바람을 뒤집어씌워 피 흐르게 해야 하는가?
아프간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인색하여도 남을 위해서는 정을 다 쏟아 보내는 민족이란 걸 부상 소녀도 알고 있지만, 이 겨울 초강국과 한판 벌이는 운명에 맞서 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그래서 부질없는, 어른들의 어른답지 않는 행동을 세월이 가서 저절로 알 때까지 굳게 살아야 한다. 하늘에는 꼭 아름다운 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슬픔을 삭히며 숨어있어 뜨겁게 타는 검은 별이 되거라며 정용국은 기원하고 있다.
인류에게 있어서 전쟁은 겨울이다. 누구든 전쟁 그 자체는 원치 않을 것이다. 불과 몇 달 전 텔아비브 거리를 넘치는 자유의 물결이며, 지중해 바닷가를 따라 야자수 우거진 이스라엘에, 진정 봄은 와도 봄이지 않는 그런 시련의 날들이 다가왔다. 아! 진정 봄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른 후에 곱게 오는가?
텔아비브의 길에서 잠시 신호 대기 중 옆에 멈추어 선 유치원 버스를 바라본다. 인형 같은 유대인 꼬마 어린이들이 차창 밖을 향에 얼굴을 밀며 단풍잎 손을 흔든다. 지금은 귀여웠던 아이들의 그 모습이 지중해의 잔잔한 은물결로 반짝이고 있다. 그리고 시청 앞 길가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안경 쓴 여인! 처음 듣는 연주곡에 매료되어 한참을 들으며, 내가 찾고 있는 봄을 발견하였다.
유치원 버스 차창 밖으로
단풍잎 손 흔들던
인형 같은 유태인 아이
웃음 짓는 모습들이
아직도
지중해 은물결로
반짝이고 있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시청 길 저 안경 쓴 여인
잔잔한 곡조가 그리는
히브리어를 들으며
선율은
국경을 넘는가
겨울도 화사한 봄이네.
- 필자의 졸시 「텔아비브 가는 길」 전문
내가 머물고 있는 경상북도 북동부의 오지 산골 마을, 영양군하고도 수하계곡이 있는 ‘수비’는 지금 한창 봄단장을 하고 있다. 해발 450m의 깊은 산골이기에 울긋불긋한 봄이 늦게 찾아온다. 그러나 반드시 온다. 시를 닮은 봄은 와서 맑디맑은 밤하늘의 별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산 빛, 철쭉 빛 타는 물이 되기도 흐르기도 한다. 한 해의 모든 것들이 다 제자리로 돌아간 계절의 끝에서는 함박눈이 먼저 쏟아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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