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모의 시에 스민 아우라
이 동 백(시인)
1
시인 권혁모는「하회동 소견」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이것이 1984년의 일이니 그는 시력(詩歷) 30년에 이른 중견 작가이다. 나는 그와 고등학교 동창의 인연으로 45년 지기(知己)인 셈인지만, 문학의 길에서 만난 것은 그가 등단하던 해이다. 그때 나에게서 그의 존재는 아득하기만 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나에게 끼친 자극은 컸다. 그 자극과 그의 부추김을 받아 문단의 말석에 앉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외우(畏友)이다.
중견답게 시조단에 이룬 그의 성과는 지대하다. 중앙일보가 주관하는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유디트」로 한국시조시인협회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시조세계」와 같은 잡지에 시조평을 지속적으로 실어 평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권 시인은 우리 안동 문협의 지부장을 역임하여 안동 문학 발전에 공을 세우면서 시조 동인「오늘」등을 통해 문단 활동도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그의 문학을 돌아보는 일은 의미 있으리라 본다.
2
“문학과 과학은 빵과 물과 같다.”
톨스토이의 말이다. 문학과 과학의 깊은 관련성과 더불어 문학이 지향하는 세계가 과학과 같은 숭엄(崇嚴)한 완전미에 있음을 지적한 발언이다. 우리는 흔히 과학도가 문학을 하면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편견이다. 이런 점에서 ‘어느만큼 시인이 아닌 사람은 결코 완전한 수학자가 될 수 없다.’고 한 바이어슈트라스의 말은 경청할 만하다.
시인 권혁모는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도이다. 권혁모가 과학도로서 시인이 된 것은 앞의 논리에 근거한다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학도이기에 오리려 정치(精緻)한 감성으로 시를 쓸 수 있는 토양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는 정치한 감성을 작품 속에 올곧게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에서 그 감성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유적으로 에둘러 표현한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바라본다.
잎잎이 갈 길 나누어 보석을 매단 외줄기
천지간 고요의 햇살을 가장 먼저 받고 싶다
한동안 잊었다가 눈여겨 바라볼수록
추억을 더듬으며 말아 올리는 저 꽃잎
손전등 환히 켜들고 나를 찾고 있다.
하루를 열고 닫듯 그럴 수만 있다면
저 가운데 한 송이 방석을 깔고 앉아
내 안에 가둬 둔 말을 관악기로 불고 싶다
-「가을 아침과 나팔꽃」 전문
가을 아침에 피어난 나팔꽃을 노래한 것으로 전형적인 선경후정의 시상 전개를 보여주는 시이다. 첫 수가 꽃이 핀 광경을 이야기한 부분이라면, 둘째, 셋째 수는 첫 수의 정경에서 촉발된 내면화된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나팔꽃의 은유인 첫 수의 ‘보석’이 둘째, 셋째 수에서 ‘손전등’, ‘관악기’로 변이의 과정을 거치면서 의미가 내면화로 확장한다. 즉 나팔꽃이 ‘손전등’으로 은유됨으로써 나팔꽃은 추억을 환기시키는 객관적 상관물이 되고, ‘관악기’로 은유됨으로써 나팔꽃은 내면의 열정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객관적 상관물이 된다. 이렇게 볼 때, 나팔꽃은 시적 화자의 감정 이입의 대상이 된다. 결국 이 시는 나팔꽃을 통해 시적 화자의 소망과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조직적인 구조 속에 세련된 비유로 내면의 정서를 교묘하게 얽어내어 이 한 편의 시를 완성시킨 것이다. 권혁모 시의 한 유형은 이렇게 은유적 기법에 의지하여 내면의 정서를 정치하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여기서 권혁모는 그 나름의 아우라(aura)를 창조해 내고 있다. 은근하게 펴지는 방향(芳香)을 그의 시에는 숨어 있다. 그의 시가 지닌 묘미가 여기에 있다.
아우라는 시가 풍기는 분위기, 뉘앙스, 방향(芳香), 여정(餘情), 영기(靈氣) 같은 것을 일컫는다.
나도 너처럼 거슬러 봄을 베고 누워도
밀어 보낸 썰물로는 다시 못 채울 그 하늘
산과 들 두 손 꼭 잡고 무지개를 바라 섰네.
단숨에 천지를 얻고 작은 영토를 만들어
그 안에 맑은 수액이 내 안에는 얼마나 있을까
해와 달 번갈아 안으며 소나기를 맞고 있네.
-<산실에서」 일부
「산실에서」 는 권혁모에게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지친 새벽에 잠을 참기 위하여 생사를 넘나드는 중환자-어머니-실과 같은 복도의 신생아실에 갔다. 유리창 너머에선 지금 막 어머니의 이름을 단 신생아들이 바구니에 누워 꿈길 향해 달려오고 있지 않았던가.”
이 작품에 대한 시작 노트의 일부이다. 생명 탄생의 경이를 ‘꿈길 향해 달려오는’과 같이 몽환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생명 탄생의 경이를 이렇듯 신비롭고 환회에 찬 기분으로 받아들인다.
이 시에 이르러서 비유는 그 단계를 넘어 상징에 이르고 있다. 일테면 ‘봄’, ‘무지개’, ‘소나기’ 등이 이에 속하는 시어일 터이다. 이 시어들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먼저 시의 내용을 살펴봐야 한다.
둘째 수는, ‘나’는 ‘너’처럼 다시 ‘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식하며, ‘무지개’를 바라볼 뿐인 상황을 읊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이제 그 어린 시절, ‘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한계 상황 속에서 오로지 신생아가 품었을 꿈-무지개-을 ‘두 손 꼭 잡고’ 바라보고 섰을 뿐이다.
셋째 수에 이르러서는 시적 화자는 생명 창조를 위한 자신의 능력에 반문하며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 앞에 나타난 것은 ‘소나기’이다. ‘소나기’는 하강적 이미지를 표상한다. 하강적 이미지는 소멸, 죽음, 파멸을 상징한다. 시적 화자가 현실에서 맞닥뜨린 것은 이러하다. 이는 아마 중환자실의 ‘어머니’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나기’가 하강적 이미지라면 ‘무지개’는 상승적 이미지이다. 이는 아기의 탄생, 아기의 꿈과 직결되는 상징이다. 시적 화자, ‘나’는 ‘무지개’와 ‘소나기’, 즉 탄생과 소멸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어내고 있는 중이다. 시인은 생명 본원의 문제를 이 시를 통해 천착하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바라본 산실의 신생아를 바라보며 환희와 절망을 경험한 시인에게서 인간적인 냄새가 짙게 난다.
3
시인 권혁모는 한때 유화 그리기에 빠져 산 일이 있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안목도 안목이지만, 그것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실제로 그는 색상에 대한 감각이 예민하다. 그래서 그의 시에 그림을 소재로 삼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봄바람 한 줄기였나, 황금빛 유혹을 참는
고혹의 눈빛이 머문 가시연꽃 몽우리
비칠 듯 젖은 옷자락 속 숨죽이며 있었다.
유채꽃 펼친 날은 꿈에서만 그리던 시절
의기였나 열사였나, 남강보다 더 푸른 조국
여자의 새파란 독이 손끝에도 묻었다.
-<유디트 -클림트 작품전에서」 일부
삐치고 치켜 올린 선과 선이 다시 살아
연초록 혹은 연분홍 나래를 얻기까지
허공을 마냥 날아서 너를 만나기까지.
(중략)
고단한 삶이었구나 당겨놓은 힘줄이
빛의 충돌이 일어나 보석으로 뜨는 밤
이제야 다 버렸으니 나와 단 둘이구나.
-<입맞춤 -이중섭의 ‘부부’」 일부
두 작품의 소재가 된 이들 그림은 특정 인물을 그린 것으로, 그 속에는 그 인물의 생애의 일부가 녹아 있다. 그림 속에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는 뜻이다. 시인은 이런 그림을 소재로 삼아 시를 썼다. 따라서 시에는 묘사와 서사가 섞여들어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유디트」는 구약 외경의 유딧서를 배경으로 삼았다.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그의 목을 베어 베툴리아를 구한 여걸 유디트를 모델로 그린 작품이다. 유디트는 남성을 파멸로 이끌만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팜므파탈의 전형이다. 클림트는 그 유디트를 파멸의 인간으로보다는 치명적인 아름다운 이미지로 형상화시켜 놓았다. 시인 권혁모 역시 클림트의 시선을 따라 시상을 얽어나가고 있다. 클림트가 창조해낸 유디트의 관능미 넘치는 눈매와 젖가슴을 시인은 ‘황금빛 유혹’, ‘고혹의 눈빛’, ‘가시연꽃 몽우리’, ‘비칠 듯 젖은 옷자락’으로 해석해 내었다. 이러한 해석은 그림을 인상적으로 묘사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첫째 수에 이어 둘째 수에서는 논개의 역사를 이끌어 와서 서슬 푸른 복수의 손길을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논개의 역사를 이끌어 들임으로써 유디트의 역사를 설득력 있는 서사로 읽히게 한다.
「입맞춤」은 이중섭의 그림「부부」를 모델로 삼았다.「부부」는 생활고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이별한 상황에서 그린 것인데, 이 그림에서는 그런 궁핍함을 읽어낼 수 없다. 오히려 이중섭의 역동적인 필치와 그의 개성적 정서가 도드라져 보이는 작품이다.
「입맞춤」의 시상 전개 양상도「유디트」와 별로 다르지 않다. 묘사와 서사의 적절한 배합이 그것인데, 첫째 수가 묘사에 중점을 두었다면 마지막 수는 서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째 수에는 그림의 역동성을 역동적인 언어로 변용시키고 있다. 거기에 부부의 한 쪽인 ‘너’를 슬쩍 등장시킴으로써 시적 긴장을 얻어내고 있다. 권 시인의 특장(特長)의 하나이다. 이는 긴장된 뉘앙스를 이루는 아우라로 작용한다.
이어는 마지막 수에서는 이중섭의 신산(辛酸)한 삶을 ‘힘줄’과 ‘빛’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고단한 삶으로 표상된 ‘힘줄’에 비해 ‘빛’은 ‘보석’을 보조관념으로 거느림으로써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부분은 역설이다. 삶은 때로는 역설적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 역설 속에서 부부는 이별이 전제된 ‘나’와 ‘너’ 단 둘 뿐임을 확인한다. 이 또한 역설이다. 이중섭의「부부」에서 역설의 미학을 찾아낸 것은 시인의 예만한 감성의 촉수일 터이다.
4
서정은 세계의 자아화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서정시는 세계(대상)을 주체인 ‘나’의 것으로 변용시키는 데서 탄생한다. 그 과정에서 ‘나’의 세계관과 감성이 세계(대상)에 관여하게 되고, 그 결과 결 고운 서정 미학이 구축된다.
등 굽은 청솔이 있고
대숲 바람 넘어오고
천주(天蛛)를 한자로 써 주신
장작을 패던 노인
눈 내린
학가산 병풍에
우표처럼 붙었다.
-<천주 마을」 일부
시인 권혁모는 천생 서정 시인이다. 그의 시를 관통하는 큰 줄기를 잡는다면 결 고운 서정일 터이다. 시력 30년을 거치면서 권 시인은 자기만의 개성을 살린 서정 미학을 이루어냈다.
시적 화자의 기억 속에 남은 ‘장작을 패던 노인’을 ‘눈’ 내린 학가산에 붙은 ‘우표’에 비유한 것은 서정의 발로로 볼 수 있다. ‘눈’과 ‘우표’는 서정의 환기물이다. 이들은 은근하게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리트머스지에 묻을 것 같은 높고 먼 봄 하늘
산새도 이런 날엔 입적에 들었는가
열차는 오시지 않고 카찰카찰 오지 않고.
-<영동 임기역」 일부
밤도 깊을수록 은하강이 잠들고
한 동안 정화수 위에 반짝이다 갈 별빛
내 삶도 그렇게 사위어 푸른 넋이 젖는다.
-<우포늪」 일부
「영동 임기역」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시인의 안타까운 정서가 담긴 시이다. 이제 ‘오지 않는’ ‘산새’와 ‘열차’로 말미암아 시적 화자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회한에 잠기거나 쓸쓸해 한다. 이는 세계의 자아화의 한 전형이다.
「우포늪」은 세계의 자아화가 훨씬 더 심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정화수’로 은유된 우포늪 위에 뜬 ‘별빛’이 반짝이다 스러지는 깊은 밤이 시적 배경을 이룬다. 기원이 집중된 성결(聖潔)한 장소이고 시각이다. 이 성결한 상황에서 소망처럼 ‘반짝이다 갈 별빛’의 운명에다가 빗대어 ‘나’의 삶을 유추하고 있다. 시인이 유추해낸 ‘삶’의 모습은 ‘내 삶도 그렇게 사위어 푸른 넋이 젖는다.’이다. ‘별빛’의 운명과 ‘나’의 운명이 교묘하게도 겹쳐진다. 앞의 ‘산새’와 ‘열차’가 정서를 환기시키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는데 비해, 이 시의 ‘별빛’은 자신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 든 것이다.
권 시인이 보여주는 시적 경향은 결 고운 서정성에 있다. 이러한 경향이 시적 변용과 내면화 과정을 통하여 그 나름의 개성적 아우라를 구축하였다. 그 아우라는 그의 시 속에 방향(芳香), 여운, 정서적 감흥 등의 형태로 스며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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